이 블로그의 제목을 잡담이라고 정한 것은 1984년 어느 봄날 오후 강의실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내게는 과분한 과외활동 리더로서의 책임을 마치고 이제 졸업을 앞둔 4학년. 시험도 합격하지 못하였고, 이대로 군입대를 할 것인 지 일단 취업을 할 것인 지 아니면 둘 다 피하기 위하여 대학원 진학을 할 것인 지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축제였는 지 데모였는 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가고시 시험 과목도 아닌데 졸업을 앞둔 4학년의 전공필수과목이던 세법 강의실에서는 적당히 휴강하자는 학생들의 성화가 터져나왔다. 아니 법대에 세법이 전공필수냐고? 그때 그 학교에서는 그랬다. 내 1년 선배까지는 전부 그랬고, 정원이 2배 가까이 늘어난 우리 학년부터는 과를 두개로 나누어 그 중 한 과에서는 필수, 다른 한 과에서도 선택이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들떠 있으면 수업 진행에 어려움이 있을 것임을 강단에 계신 선생님이 모르실 리가 있겠는가.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고 난 후 오늘은 골치 아픈 세법 강의는 그만두고 잡담이나 조금 하고 나가겠다고 하신다.
세법이라고 하면 여기 이 두꺼운 세법전에 수록된 국세기본법, 국세징수법, 부가가치세법, 소득세법, 법인세법, 상속세법, 지방세법, 조세범처벌법, 조세범처벌절차법 등 여러 법률에 각기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있고, 행정해석인 기본통칙과 예규가 포함되는데, 당신도 그 성격을 규정하지 못하겠다고 하신다. 일단 국민에게 명령, 강제를 하는 것이니 공법으로서 행정법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고, 법률에 의한 과세나 대표없이는 과세 없다던가 공평한 과세라는 관점에서 보면 헌법의 한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고, 공법이면서도 민사 및 상사거래에 대하여 부과되는 것이니 민법과 상법을 충분히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고, 징수 단계에 가서는 강제집행과 유사한 체납처분 절차를 거치니 민사소송법도 이해하여야 하고 세금납부에 관한 규칙을 어기면 형사처벌을 받고 게다가 그 절차도 특별하니 형법과 형사소송법도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의 ‘육법’과 행정법을 일반법으로 배운 기초 위에서 세법전을 읽어야 세법을 알 수 있는데 그 뿐이 아니다. 여기에 인접 학문으로서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조세의 효과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재정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사업소득세와 법인세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회계라는 일종의 언어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또 역사적으로 헌법적 의미가 있는 혁명에는 세금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니 역사나 정치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와 같이 잡다한 학문영역이 관련되어 있어 동료 교수님들은 모두 당신이 가르치시는 세법을 잡법雜法이라고 일컫는다고 하신단다. 그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은 세법은 잡법이니, 세법 이야기는 잡담이 되겠다는 것이고, 오늘은 그렇게 잡담이나 하고 가시겠다고 하시더니, 결국 그날 세법 이야기 즉 잡담을 하고 나가셨다. 그날 무슨 잡담을 하셨는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기억할 수 있겠는가만은, 남대문시장의 상인들도 금방 이해하는 부가가치세를 명문대학의 법대생이 이해하기 힘들어한다던가, 조세피난처tax haven의 철자를 잘못 이해하여 조세천국tax heaven이라고 이름 붙인 예, 인생의 결산은 무덤 속에 들어갈 때 하는 것인데 세무서는 기다려 주지 않으니 과세기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야기, 세금은 무산국가의 존립기반인데 당신이 젊을 때에는 국가 재정을 거의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기에 세법이 중요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라가 잘 된다면 세금의 역할이 커지고 따라서 세법도 중요해질 것이라는 말씀은 지금도 기억이 나는 잡담이다.
학생은 선생님을 모방하고 싶어한다. 필자도 한 다리 걸치고 있는 파산법에 대하여 가끔 강의할 때 잡담이나 조금 하고 가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존경하는 한 실무가는 파산법은 오케스트라 비슷하다고 표현하신 바 있다. 약간의 경제학 지식과 회계원리의 이해가 도움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채권과 물권의 효력, 법률행위의 처리 같은 항목을 포함하고 있으니 응용민법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회사법에서 조직변경부터 어음,수표의 특칙에 이르기까지 상법의 실체법상의 규정을 수정할 수 있으니 상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수의 소송과 강제집행절차, 임의경매절차가 집적된 것처럼 가정하고 일을 처리하니 민사소송법이며 또한 민사법상의 권리를 제한하니 재산권의 수용이나 경제규제의 한계를 생각해야 하니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편으론 절차를 방해하는 것은 형사범으로 처벌되니 형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들 모두를 두루두루 어느 정도는 이해하여야 할 수 있는 것이 파산법이니 어찌 보면 오케스트라라고도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얕은 지식만으로 두루두루 아는 체 하여 온 내게는 그저 잡법으로밖에 대접 받지 못하는 파산법은 아쉬워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젊은 시절 방황도 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잡담”이나 하며 주제넘은 교만함의 시절도 겪어 가면서 세월이 흘러 흘러 그 때 그 선생님의 춘추를 내 나이가 10년 가까이 넘겨 버렸다. 직업 경력을 또 인생을 마감할 때가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특별히 두드러진 업적을 이룬 것도 없는데 다만 너무나도 운이 좋아 주위의 관대한 현인들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두루두루 아는 척하면서 살아왔다. 직업적 동료들을 위한 일에 완장 차고 나설 수 있도록 뜻을 함께 하여 주신 젊은 동료들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이런저런 매체에 오른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동조하여 주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이제 내가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또 어깨 넘어 몰래 보고 주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전하고자 하는데 아마도 그 대부분은 ‘잡법’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법률 언저리에 있는 자투리 조각 지식 정도일 것이고 여기에 시사월간지나 여행잡지 수준에서 보는 교양이 추가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필자만의 어거지나 편견이 대부분일 수도 있겠다. 나중에 보면 부끄러워도 당장은 나름의 주장을 해야 하는 직업상의 과감함에 대하여는 읽는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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